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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 서도재 이민기의 사진
    서도재 이민기 선호그룹 티로드항공 본부장

    그는 신이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된다.

     

    세상에 평등이라는 말만큼 우스운 말은 없다. 도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 축하 선물로 통장에 ‘0’ 열한 개쯤은 가뿐히 받았고, 자라며 부친에게 받은 수려한 외모와 키를, 모친에게 받은 타고난 머리를 자랑했다. 그 자랑은 도재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재의 집안이, 도재의 집안이 가진 그룹이, 그 그룹이 발 딛고 서 있는 대한민국이 했다. 이 잘나디 잘난 재벌 3세를 온 나라가 주시했고, 도재는 한번 고꾸라지지 않고 그 시선에 보답했다. 그야말로 훌륭한 시대의 남성상이었다.
     
    안 그래도 가진 게 많은데 다 자란 나이에 새 아버지와 새 여동생까지 가지게 되었다. 둘 다 자신과는 피 한 방울, 마음 한 자락 섞이지 않은 인연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나 일 속에만 파묻혀 살던 제 어머니가 건강한 화초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는 모습이 제법 보기 좋았다.

     

    새 여동생인 사라가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 ‘하늘’은 제 ‘하늘’이었으니까. 하늘은 의심 없이 도재의 것이자, 도재의 운명이었다. 사라가 아니어도 선호그룹의 핵심인 티로드항공을 노리는 일가친척만 수십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티로드항공에서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도재의 책임이 막중했다. 도재의 얼굴은 곧 티로드항공의 얼굴, 티로드항공의 얼굴은 곧 선호그룹의 얼굴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회사 앞 입간판에 승무원 복장을 하고 서 있는 얼굴은 세계의 것이었지만.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흉터를 남긴다.

     

    애석하게도 신은 공평하다. 때때로 발걸음이 늦을 뿐. 신의 공평은 스물다섯, 미국 유학 시절에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차에 치이려던 할머니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도재는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통칭 안면인식장애였다.

     

    흠 하나 없던 삶에 생긴 균열을 감추기 위해 도재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앞에 선 여성이 내 어머니인지, 지나가던 옆집 아주머니인지 알기위해 자주 입는 옷차림, 손버릇, 걸음걸이, 가까이서 맡아지는 체향 하나하나 모두 다 기억했다. 어디를 가도 항상 비서를 대동했다. 그러고도 찾아오는 위기상황은 타고난 임기응변으로 모면했다. 활주로보다 더 드넓고 매끈했던 탄탄대로의 삶을 잃어서는 안 되니까.

     

    도재의 부서에 있는 모든 직원들은 이름표를 착용했다. 회사 내에서 오직 이 부서만. 이 별난 본부장님이 싫을 만도 하건만 어찌된 건지 여사원들의 판타지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하긴. 수정 씨, 머리 바꿨네요? 못 알아봤어요, 같은 지극히 진실 되고 지극히 설레는 멘트를 마구잡이로 뱉어대는 도재를 연모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 리가.

     

    원래 도미노란 일순간 무너지기 위해 세우는 것.

     

    세계의 스캔들이 터지는 날은 회사의 주식이 바닥을 치는 날이었다. 따라서 도재의 기분도 바닥을 쳤다. 계약을 파기한 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멀리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아니었으면 완벽히 그랬을 것이다. 직항이 없는 노선을 대한민국 항공사 최초로 취항하기 바로 직전인 순간이었다. 코드셰어를 하기로 한 외국항공 대표에게 직통으로 전화가 왔다. 한세계를 모델로 쓰지 않으면 이 모든 계약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쪽 대표가 이 계약에 오케이를 한 이유가 순전히 티로드항공 모델이 한세계이기 때문이란다. 노선 취항은 비단 노선 취항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 들어서기로 한 거대 호화 리조트, 그에 따른 관광사업까지. 노선 취항이 무너지면 줄줄이 도미노처럼 모든 게 무너지게 된다. 할 수 없다. 이 도미노를 지키기 위해선 이 도미노의 제일 첫 번째 블록인 한세계를 넘어지지 않게 하는 수밖에는.
     
    그렇게 애써 한세계라는 도미노 블록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도재 앞에 낯선 여자가 나타난다.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힐을 신고서 또각또각 제게로 걸어오는 걸음걸이, 손끝의 온도, 촉감. 처음 보는데도 자꾸만 익숙했다. 꼭 본 것만 같은데. 일주일 전에도, 그제도, 분명 어제도 만났던 것 같은데. 그때는 조금 더 키가 컸던 것 같기도, 작았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물었다. 너 도대체 누구냐고. 그랬더니 그 여자도 물었다. 당신 도대체 뭐냐고. 그 순간, 도재의 마음 속 견고한 도미노가 경쾌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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